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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 모델생물 운동
이름 관리자
작성일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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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생물(model organisms)은 현대 유전학의 근간입니다. 생물학이라 하면 당연히 생명현상을 다루는 학문일진대, 이 생명현상이란 건 너무너무 복잡하기 짝이 없어서 여간 다루기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에 무엇보다도 단순화된 생명현상, 모형화된 생물이 필요했습니다. 이게 바로 모델생물입니다.

모델생물은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우려됐던 생명현상을, 연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린 생물학의 주역입니다. 하나의 수정란이 복잡한 개체로 자라는 발생은 세포들이 워낙에 빠르게 분열하다 보니 한때 일일이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생명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세포 수 1,000개 남짓 되는 단순하고 투명한 생물 덕분에 수정란부터 시작된 모든 세포분열을 일일이 눈으로 따라잡는 게 가능해졌습니다(Sulston et al., 1983). 게다가 이 예쁜꼬마선충은 돌연변이 만들기도 쉬워서 온갖 괴물들이 줄줄이 만들어졌고, 이 괴물들에 생긴 돌연변이를 살피다 보니 어떤 유전자가 발생 과정을 조절하는지 하나둘씩 해결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동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단순하고 하찮았기 때문에 생물학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근데 세상이 너무 좋아지는 바람에 모델생물 단물이 많이 빠졌습니다. 사골도 며칠 끓이면 골수까지 다 뽑히는데, 예쁜꼬마선충 같은 모델생물은 50년 넘게 빨아먹고 있었으니 좋은 건 이미 거의 끝나지 않았겠어요? 업계 선생님들이 어찌나 부지런하게 일하셨는지 제가 대학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돌연변이를 만드는 유전학 기법을 동원해 발생이나 노화처럼 흥미로운 생명현상의 비밀을 간단히 풀 수 있는 연구는 포화상태였고, 사람을 갈아넣든 돈을 갈아넣든 뭔가 과도하게 때려넣지 않고서야 재미 보기 어려운 판이 되어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나눠먹을 게 많아서 서로 나는 이 연구할 테니 너는 저 연구해라 하하호호 사이 좋게 토론하고, 연구 초기 결과도 너나 할 것 없이 나누며 학계를 발전시키는 게 벌레 바닥 문화였는데, 강호의 도가 바닥에 떨어져서 이제는 다들 어느 정도 정리된 연구 성과만 학회에 가져오기 시작한 지도 꽤 됐습니다. 그래도 다른 모델생물 바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서로 친절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뭘 하냐? 다들 새로운 생물 연구로 관심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예쁜꼬마선충을 비롯한 기존 모델생물만큼 자세히 아는 생물은 없다 보니, 예쁜꼬마선충이랑 가깝지만 연구가 거의 되지 않은, 그러면서도 신기한 생명현상을 지닌 선충을 하나둘씩 자세히 살피기 시작한 겁니다. 누구는 평소에는 세균 먹다가 굶기면 예쁜꼬마선충도 잡아먹는 선충을 연구하고(Sommer and McGaughran, 2013), 누구는 연구실 밖으로 뛰쳐나가 야생에 사는 예쁜꼬마선충과 그 친척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Frézal and Félix, 2015). 태초마을을 떠나 포켓몬마스터가 됐던 지우처럼, 선충 연구하는 사람들도 예쁜꼬마선충을 벗어나 새로운 모델생물 발굴을 위한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모델생물을 찾는 일은 선충에 국한된 것만도 아닙니다. 토머스 헌트 모건이 여름이면 초파리들을 가득 싣고 해양생물학연구소(Marine Biological Laboratory)로 떠나 온갖 생물을 연구했던 것처럼(Kenney and Borisy, 2009), 유전학을 연구하는 후손들은 이제 기존에는 다루기 어려웠던 생물들을 가장 최신의 유전학 기법을 동원해 자세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계급을 나누고 복잡한 사회를 꾸리고 사는 개미는 진사회성 연구를 위한 모델생물이 되고 있고(Chandra et al., 2018; Yan et al., 2017), 수명이 불과 6개월밖에 되지 않는 물고기 킬리피쉬는 척추동물의 노화를 연구할 모델생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Reichwald et al., 2015; Valenzano et al., 2015). 두족류가 어쩜 그리 똑똑한지 알고 싶어했던 연구자들은 문어의 유전자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고(Liscovitch-Brauer et al., 2017), 벌거숭이두더지쥐가 신맛이나 매운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걸 발견한 연구자들은 아프리카에 사는 두더지쥐 친척 종들의 유전자를 싹 뒤져서 고통을 못 느끼게 된 유전 요인을 찾고 있습니다(Eigenbrod et al., 2019).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물의 수만큼이나 신기한 생명현상은 예전부터 널려있었지만, 수십 년 동안 모델생물을 연구하려고 개발한 온갖 유전학 기법들이 이제야 이 생물들을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